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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성현
  • 2012-08-22 15: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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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의 바덴바덴

비 내리는 여름의 바덴바덴은 정말 아름다웠다. 바덴바덴의 적막한 우아함에 비할 수 있는 장소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유럽의 수많은 도시들이 저마다 아름답다고들 뽐내지만, 바덴바덴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의 하나다. 바덴바덴은 매일 아침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기쁨을 느끼게 해 주고, 내가 그곳에 올 수 있었음을 신에게 감사하게 되는 곳이다. 또한 헤어질 시간이 다가올수록 점점 안타까워지는 연인의 심정을 느끼게 해 주는 곳이다.

바덴바덴의 적막한 우아함

내가 묵던 호텔 다락방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5층 높이의 다락방 창문에서 내려다본 바덴바덴의 숲은 초록의 성숙한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으며, 땅바닥은 매끈한 잔디 때문에 연두색 융단을 깔아 놓은 듯이 광채가 났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 흐르는 오스 강…….

강이라기보다는 개울이라고 부르는 편이 더 어울릴 정도로 규모는 작다. 하지만 이 물줄기가 없다면 과연 바덴바덴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스 강은 바덴바덴의 센 강이자 아르노 강인 것이다. 그러니 나도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인 이 물줄기를 그들처럼 강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누가 언제 깔아 놓은 것인지, 오스 강의 바닥 전체에는 편평한 석판들이 깔려 있다. 그 석판들이 5층에서도 환히 보일 정도로 강물은 맑았다.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듯한 마을이지만, 구석마다 사람의 세심한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해 여름은 어찌 그리 비가 자주 오던지……. 운 좋게도 밖으로 나가면 환하게 해가 비치고, 방으로 들어오면 다시 차분하게 가랑비가 내리곤 했다. 그래서 그 며칠 동안 나는 변덕스러운 날씨를 즐기면서 지냈다. 숲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보고, 다락방의 작은 창문을 열어 놓고 창가의 비좁은 책상에서 글을 쓰곤 했다. 글쓰기가 지겨워지면 밖을 내다보았다. 가까운 잔디를 쳐다보다가 가끔은 눈을 돌려, 멀리 도시를 에워싼 산줄기의 흑림(黑林)을 감상했다. 방에는 다행히도 낡은 라디오가 한 대 있었다. 이상하게도 라디오를 틀 때마다 피아노 음악이 나왔다. 그 덕분에 나는 앵앵거리는 소음이 뒤섞이긴 했지만 어쨌든 피아노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가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이라는 것을 거기서 새삼 느꼈다.

아름답고 화려한 온천 도시 바덴바덴의 느낌은 우아하다.

목욕을 위해 모여든 도시

바덴바덴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유럽 최고의 온천장이다. 고대 로마 때부터 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이곳까지 찾아와서 온천을 즐겼다고 한다. 우리나라 충북의 수안보 온천에 가면 마을 입구에 ‘왕의 온천’이라는 커다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임금들이 이곳에 와서 온천을 즐겼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바덴바덴은 독일의, 아니 유럽의 ‘왕의 온천’이었다.

바덴바덴에서 온천이 발견되어 알려진 것은 2천 년 전이라고 한다. 이름도 ‘바덴바덴(Baden-Baden)’, 우리말로 하면 ‘목욕, 목욕’이다. 그냥 바덴바덴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 어원은 ‘바덴 주의 바덴’으로 그래서 ‘바덴, 바덴’인 것이다. ‘뉴욕 주의 뉴욕’이라고 해서 ‘뉴욕, 뉴욕’이라고 부르던 것과 같은 이치다.

18세기에 이르면 바덴바덴에는 지금과 같은 대형 목욕장 시설이 들어서고 그 명성이 모든 유럽에 퍼졌다. 수질이 좋기로 유명한데다, 흑림이라고 부르는 검은 침엽수림이 주변의 수십 킬로미터에 펼쳐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유럽의 왕족, 귀족, 부호, 유명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여름 휴가철이면 이곳의 온천과 흑림의 신선한 공기를 즐기기 위해 유럽 제후와 귀족들이 하도 많이 몰려들어서 ‘유럽의 여름 수도’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심지어는 멀리 러시아의 황제까지 이곳을 찾았다 하니 그 명성을 짐작할 수 있다.

원래 기차역이던 건물이 개조되어 바덴바덴 축제극장으로 변모했다.

온천이 발달하면서 카지노, 무도장 등이 함께 발달했고, 세계 수준의 레스토랑과 카페들도 많이 들어섰다. 지금은 류머티즘, 재활 의학 등 여러 병을 치료하기 위한 의료 시설과 요양 시설이 많아져서, 치료를 위한 방문자도 적지 않다.

또한 이곳은 많은 예술가들이 즐겨 찾아서 영감을 받고 몸과 정신을 쉬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 아예 집을 구해서 살았던 브람스를 포함하여, 베를리오즈나 바그너 등이 모두 이곳을 사랑했다. 지금은 바그너의 축제극장이 바이로이트에 있지만, 바그너가 원래 축제극장을 짓고 싶어 했던 장소는 바덴바덴이었다. 게다가 러시아 황제를 따라서 러시아 작가들, 즉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등이 모두 이곳을 방문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는 오랫동안 이곳에 머물면서 소설 [노름꾼]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렇게 바덴바덴에서 지내던 도스토옙스키를 그린 소설이 레오니드 치프킨의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이다.

기차가 끊긴 정거장, 극장으로 부활하다

그러던 중 바덴바덴은 2천 년 온천장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기를 맞게 되었으니, 바로 바덴바덴 페스티벌의 창설이다. 1990년대에 이르자, 유럽 최고의 온천이라는 바덴바덴의 명성은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유럽에는 너무나 많은 온천들이 개발되어서, 외국인들로서는 굳이 이곳까지 와야 할 당위성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민들 사이에서 이 도시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이곳에 극장을 짓자는 의견이 나왔다. 좋은 극장을 지어서 좋은 공연을 유치한다면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 것이고, 그와 더불어 온천도 다시 활성화되어, 바덴바덴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바덴바덴의 유지들은 극장을 지을 목적으로 기금을 내놓게 되었다. 원래 이곳은 세계적 수준의 미술관인 프리더 부르다 미술관이 운영되는 등 예술에 대한 개인들의 사회적 기여가 높은 곳이었다. 그런 시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본 시 당국에서는 선뜻 부지를 무상으로 내놓았다. 시에서는 땅을 내놓고 거기에다 시민들이 건물을 짓는 이상적인 형태였다.

바덴바덴의 문화 기금에 기꺼이 참여한 사람들 명단. 프리더 부르다의 이름도 보인다.

시에서 내놓은 땅은 더 이상 기차가 운행하지 않는 옛 역 건물이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기차의 선로가 바뀌자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중앙역 건물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새 극장(과거에 사용하던 옛 극장의 건물은 지금도 시내에 남아 있다)을 설계하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건축가인 빌헬름 홀츠바우어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즉 바로크 양식을 절충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중앙역 청사는 그대로 두고, 그 뒤에 초현대식 새 극장을 짓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과 구가 절묘하게 결합된 방식의 극장이 탄생했다. 이것이 바로 바덴바덴 축제극장(Festspielhaus Baden-Baden)이다.

바덴바덴 축제극장은 1998년 4월 18일에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평화를 위한 월드 오케스트라’의 개막 연주로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이것이 바덴바덴 페스티벌의 시작이었다. 기차도 들어오지 않는 역 건물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0년 만에 이룬 정상의 페스티벌

불과 10여 년 만에 바덴바덴 페스티벌은 세계 굴지의 페스티벌로 자리 잡았다. 100여 년에 이르는 역사를 가진 다른 유럽 페스티벌이 겨우 이루었거나, 아니면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을 단 10년 만에 이룩한 것이다.

이 페스티벌의 존재를 세계에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이곳의 공연을 담은 한 장의 DVD였다. 《바덴바덴 오페라 갈라The Opera Gala: Live from Baden-Baden》라는 이름으로 나온 2007년의 공연 실황으로, 이것을 본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바덴바덴이라는 도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이 갈라 콘서트에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랑차 등 세계적인 성악가들이 나와서 놀라운 수준의 곡들을 본격적으로 들려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정말 저곳의 수준이 이 정도이며, 저곳에서는 늘 이런 공연이 올라가며, 이것이 전 세계 사람들이 저곳으로 모여드는 이유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했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부터 하자. 과연 그곳은 이 정도의 예술가들이 나오는 곳이며, 거의 1년 내내(특정한 한 철이 아니다) 이런 공연이 올라가며, 그것을 보기 위해 독일이나 이웃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 세계 사람들이 몰려든다.

이 DVD에 담긴 갈라 공연은 페스티벌이 시작된 지 불과 10년 만에 이루어졌으니, 바덴바덴 페스티벌은 단 10년 만에 세계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다. 바덴바덴 페스티벌 측에서는 이 공연뿐 아니라, 바그너의 《탄호이저》, 《로엔그린》 등 자신들의 공연 실황을 속속 DVD로 출시했는데, 이것들은 모두 대단히 뛰어난 수준의 공연을 담고 있다. 그러니 DVD를 본 세계 음악 팬들이 바덴바덴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바덴바덴으로 다시 모여들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바덴바덴 축제극장에는 기차 시간을 알리던 벽시계도, 기차표를 팔던 매표소도 그대로 있다. 다만 기차표 대신에 공연 티켓을 판다.

이제 극장으로 들어가 보자. 이전의 중앙역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서,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들어갈 때 보게 되는 모습 그대로다. 기차역의 로비가 현재 극장의 로비로 사용되고 있다. 승객들이 기차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쳐다보았을 그때 그 시계도 벽에 그대로 붙어 있다. 기차표를 팔던 매표소는 ‘기차표’라고 쓰인 옛 표지판을 그대로 붙이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역을 연상시키는 그 좁은 창구에서는 이제 기차표가 아니라 공연 티켓을 판매한다. 티켓을 받아 들고 개찰을 하고 들어가면 과거 플랫폼이 있던 자리가 로비로 변해 있다. 그 로비에는 ‘아이다 홀’이라는 이름이 붙은 레스토랑 겸 카페가 있고, 그 뒤로는 이전에 기차가 들어오던 넓은 선로가 있는 대지에 초현대식 극장이 세워져 있다. 그 극장에서는 세계 첨단의 다양한 공연들이 올라간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우리처럼 옛 건물을 부수고 또 새로 짓고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건물을 그대로 유지한 채 용도만 살짝 바꾼 것이다. 이전의 것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창의성을 가미하는 지혜……. 그 자체로 이미 예술의 경지다.

정부 지원금을 거부한 최초의 페스티벌

무엇보다도 운영에서 단 한 푼의 정부 지원금도 받지 않는 것이 바덴바덴 페스티벌의 특징이다. 대부분의 유럽 오페라 극장이나 콘서트 홀의 재정은 국가나 지방 정부의 지원에 크게 의존한다. 하지만 바덴바덴 페스티벌은 처음부터 정부의 지원금이나 간섭을 받지 않고 독립채산제로 운영되는 유럽 최초의 민영 극장이다. 극장이 곧 페스티벌 주관 기관으로, 극장 당국이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운영한다. 그러므로 정부에서는 페스티벌의 운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는다.

그들은 페스티벌과 극장을 완벽한 비즈니스 형태로 꾸려 가기로 결정하고, 2002년 이후로는 재정적으로 완전히 홀로 섰다. 국가나 지방 정부의 지원금은 일부러 한 푼도 받지 않기 때문에, 경영은 물론이고 예술적으로 완전히 독립해 있다. 전체 예산의 60퍼센트 정도는 티켓 판매로 충당하고, 일부는 DVD 판매 수익으로 메운다. 또한 녹음을 원하는 사람 등에게 공연장을 대여하고, 나머지는 바덴바덴 시민들의 기부금과 기업체의 후원금으로 충당한다.

처음 페스티벌을 시작할 때는 티켓 가격을 잘츠부르크에 맞추어서 최고석을 300유로(한화로 약 50만 원) 가까이로 책정했다. 하지만 첫해에 페스티벌은 수십억 원의 적자를 내고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시민들은 자신들의 결정이 무모했다고 판단했다. 잘츠부르크, 바이로이트, 인스브루크, 뮌헨 등 기존의 유명 페스티벌 지역이 너무 가깝고, 시가 가진 기본 인구가 겨우 5만 명 정도로 너무 적다는 등 부정적인 의견이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당국은 위기를 타파할 새로운 인물을 선정하여 전권을 맡기게 되었으니, 그가 안드레아스 묄리히체바우저다. 극장장으로 취임한 묄리히체바우저는 기업 경영식 모델을 전면적으로 도입했다. 그는 주변의 프랑크푸르트, 슈투트가르트, 하이델베르크, 프라이부르크, 스트라스부르 같은 큰 도시에 적극적인 홍보를 펼쳤고, 공연 때는 그곳에서 바덴바덴 축제극장까지 셔틀 버스를 운행했다. 또한 티켓 가격도 대폭 내려서 일단 관객들이 바덴바덴 페스티벌의 맛을 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공연이 없는 날에는 극장을 CD나 DVD를 제작하기 위한 녹음 장소로 대여했는데, 이 역시 호응을 받았다. 2,500석에 달하는 대형 극장을 녹음 장소로 잡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으로 페스티벌은 2004년부터 흑자로 돌아섰으며, 이와 더불어 금전적인 면 이상의 인기와 신뢰를 얻게 되었다.

바덴바덴 축제극장의 내부는 초현대식이다.

계절마다 열리는 연중무휴의 축제

바덴바덴 페스티벌의 재미있는 특징 중 하나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일부 축제를 가져와서 스스로에게 이식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세계적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만든 ‘성령강림절 음악제’다.

이 축제는 원래 카라얀의 아이디어로서, 잘츠부르크의 부활절 음악제와 여름 페스티벌 사이의 기간에 진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989년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자, 그때까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인기가 올라가던 축제들이 관객 동원에서 주춤하기 시작했다. 카라얀 효과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자 잘츠부르크 관계자들은 잘츠부르크에 축제가 너무 많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결국 예산을 줄이기 위해 성령강림절 음악제를 없앨 방도를 찾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덴바덴에서는 그 축제를 자신들이 유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993년부터 잘츠부르크 성령강림절 음악제는 바덴바덴에서 올라갔다. 바덴바덴 페스티벌의 시금석이 된 것이다.

이후 바덴바덴에서는 성령강림절 음악제를 중심으로 계절마다 각각 네 번의 페스티벌을 진행하는 야심 찬 기획이 자리를 잡았다. 즉 봄(성령강림절)을 중심으로 여름, 가을, 겨울 등 각 계절마다 약 1주일 정도의 축제를 연다. 그리고 굳이 축제 기간으로 분류되지 않더라도 자주 공연이 있어서, 사실상 1년 내내 공연이 이루어지는 형태다. 정리하자면, 거의 연중 내내 공연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네 번의 기간은 더 좋은 공연들이 매일 이어진다고 보면 된다. 다른 극장들에서는 페스티벌 기간이 따로 있어 그때만 페스티벌을 펼치는 것이 관행이지만, 바덴바덴 축제극장은 극장 자체가 바로 페스티벌 당국으로, 연간 벌어지는 모든 공연이 페스티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바덴바덴은 대부분의 페스티벌들이 1년에 한 번의 축제 기간을 갖는 관행을 과감히 깼다. 그들은 어차피 비어 있는 극장을 돌려서, 연 4회의 페스티벌 기간을 갖는 참신하고도 위험한 계획을 세웠다.

바덴바덴 축제극장 앞에 게시된 최정상 스타들의 공연 포스터들.

경비는 줄여도 감동은 높이는 운영

4번의 축제 기간에는 최소한 1회 이상의 오페라 공연이 꼭 들어가는데, 이것이 바덴바덴 페스티벌에서 가장 중요한 공연으로 각 계절의 백미가 된다. 2011년에는 사상 최고의 캐스팅을 자랑하는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올라갔다. 여기에는 일데브란도 다르칸젤로, 디아나 담라우, 조이스 디도나토, 롤란도 비야손 등 사상 최고의 가수들이 동원되었다. 단 1회 공연이었기 때문에 예산을 아끼기 위해 무대를 만들지 않고 콘서트 형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예산 절감을 위한 최신의 경향이기도 하다.

2004년에는 토마스 헹겔브로크가 지휘한 베르디의 《리골레토》, 켄트 나가노가 지휘한 바그너 시리즈인 《로엔그린》, 《탄호이저》, 《파르지팔》 등이 유명했으며, 2005년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한 《마술 피리》도 잊을 수 없는 공연이었다. 오페라 외에도 바덴바덴 페스티벌에서는 베를린 필하모닉이나 말러 챔버 오케스트라, 뮌헨 필하모닉, 베를린 도이치 오페라 오케스트라,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 등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독주자들의 콘서트가 열리며, 발레나 다른 세미나도 즐길 수 있다.

2012년에는 게르기예프가 지휘하는 마린스키 극장 팀이 와서 바덴바덴 축제극장과 공동 제작으로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한다. 이렇게 바덴바덴 축제극장은 공연을 일일이 직접 제작하지 않고, 그 대신 유럽 굴지의 극장들과 제휴해서 품질은 유지하되 제작비를 줄이는 방식도 택하고 있다. 즉 바덴바덴 축제극장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 바이에른의 국립 오페라 극장, 베를린의 도이치 오페라 극장, 엑상프로방스 페스티벌 등과 오페라를 공동 제작해서 올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공연은 2003년에 마린스키 극장과 공동으로 올렸던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었다. 게르기예프의 지휘에 게오르게 치핀의 무대가 인상적이었던 이 프로덕션은 서울에도 와서 1회 공연하기도 했다.

<돈 조반니>의 공연 배너가 걸려 있는 바덴바덴 축제극장. 위로 기차역의 이름이 그대로 붙어 있는 게 보인다.

브람스가 잊지 못한 곳, 나도 잊지 못하는 곳

바덴바덴을 말하려니, 일부러 찾아갔던 브람스의 집이 떠오른다. ‘브람스하우스’는 바덴바덴 교외의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찻길부터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이어지는 길이 하도 아름다워서 계단을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기대에 들떠 있었고, 돌아올 때는 아쉬움에 다리가 떨어지지 않던 그런 그림 같은 집이었다. 브람스는 이곳에서 1865년부터 1874년까지 머물면서 불후의 명작 <독일 레퀴엠>을 비롯하여 교향곡 제1번, 제2번 같은 작품들을 썼던 것이다.

바덴바덴의 평화로운 카페는 안락함의 상징이다.

브람스의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 작은 집에서 브람스가 주로 사용했던 공간은 아주 작은 방 두 개였다. 하나는 침실이요, 다른 하나는 작업실이었다. 그의 작업실에는 창문이 있었다. 그 창문 앞에 작은 책상이 놓여 있어, 거기에 살짝 앉아 보았다. 그 자리에서는 창밖 풍경이 기막히게 보였다. 왼편으로는 높은 성당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마을의 붉은 지붕들이 나지막하게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흑림이 펼쳐져 있었다. 브람스는 자신의 작품에서 이 아름다운 풍경들을 소리로 바꾼 것이 아니었을까? 가만히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디선가 <독일 레퀴엠>이 들려와서 풍경 위로 흐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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